Saerin has come!
SHOW
〔 작가노트 〕
선택 현실은 믿음을 기만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 갈라진 틈이 아득한 입을 벌린다. 닿을 것만 같았던 이상이 한순간 휘발된 자리에 믿음과 신념이 남는다. 흔들리고 불안정한 상태로. 실체 없는 상념을 강제로 물질에 묶어두거나, 부정하고픈 현실을 고발하듯 묘사하기도 했다. 그것이 되려 내 발목을 잡았는지 내가 기꺼이 붙잡혔는지는 확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물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무엇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스스로 묻다 보면 치우친 관점과 기울어진 무게 중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의자나 양동이의 모양을 한 저울추가 여럿 생겼다. 눈앞에 성큼 다가와 나를 흔들던 의구심을 들이밀 때도 있다. 아무런 의미도, 입장도 표명하지 않는 사물들이 나로부터 비친 현실을 함축적으로 형용한다. 의도 없이 무심코 그 자리에 있을 뿐이요, 사용 목적 이상의 의미가 없는 부동(不動)의 존재들이 현실의 변덕, 그 속의 모순과 괴리를 건넨다. 사물, 기호, 텍스트 등의 영혼 없는 대상들에게 존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니 실상을 반영하고 이상을 반사한다. 믿음과 신념을 향해 재현된 언어다.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뚜렷이 각인된 문자가 있고,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속 유독 선명해지는 이미지가 있다. 이들이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와 대체 언어가 되어 내부 세계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는다. 뜻하지 않은 순간 그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 부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행위가 그저 혼돈이던 지난날, 배경과 색채를 통제해 화면에 드러나는 세계를 온전히 나의 소유와 권한 아래 가두고자 했다. 이제는 그 의지와 의미가 점차 해소되어감을, 동시에 외부를 향하는 나의 시선이 잦아짐을 어렵고 더딘 반가움으로 인정한다. 가두었던 것들이 내 손으로부터 흘러나와 조형이 되어 화면에 자리하니 또 다른 세계의 지평이 멀어진다. 그 속을 걷다 보면 꽤 많은 것을 줍게 될 일이다. 갈 길이 멀다. _김세린 Vertical Divider
|
𝗜촬영/편집_남윤아,손지훈
TELL
《벌어진 세계》 전시서문: 뭉툭한 인사
삐딱한 자세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의 그림 옆에 서 있던 김세린을 기억한다. 박쥐 모양의 검은색 덩어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림이었는데, 본인과 작품이 똑 닮아 묘하게 우스웠다. 기분이 말과 표정으로 쉽게 드러나는 나와 달리, 김세린은 언제나 침착했다. 뱉어버린 말이 향할 곳을 직시하며 염려했다. 또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이것저것 일그러진 것들 사이로 언짢은 티가 날까 꽁꽁 싸매 묶어두는 편을 택했다. 우린 함께 예민했지만, 그것 말고는 모두 달랐다. 나는 이따금 김세린이 그린 그림들로 그의 상태를 가늠한다. 정갈함 대신 가장자리가 불분명해지고 어긋난 무언가가 생겨날 때면 말을 걸어서 얻을 게 하나도 없는 상태니 그냥 가만히 두어야 한다. 말과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은 그림이 대신 소리치고 동요한다.
김세린은 무엇이든 쉽게 미워하지 않았다. 누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솔직히 10분 정도는 그 사람을 평생 안 보고 살 상상이나 하는 난 그런 그가 신기했다. 누군가와 다투면서도 상대를 더욱 미워할 궁리를 하기보단 좋은 면을 기억하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약한 부분을 찌르고, 덮어두고 외면하며, 냉정하게 뒤돌아 버리는 것이 더 익숙한 세상에서 김세린이 지키는 믿음과 신뢰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 궁금했다.
나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보다는 알았던 사람을, 가지고 싶은 것보다는 쥐고 있던 것을, 아는 것보다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뒤를 의식하며 걷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머물게 되는 지점들이 있는 게 분명했다. 김세린은 이해하고 싶기에 잊지 못하는 사건과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의문들의 곁을 지켰다. 내 눈에는 그냥 툭 털고 나아가면 그만인 일까지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오래 지난 일도 또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에(종종 무책임하고 싶은 나에게 가장 난감한 부분이다.) 자신에게 잔인하게 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꼴이 못마땅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제사나 의식을 치르듯 이미 지나간 것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꺼진 믿음으로부터 자라난 것들은 사물의 탈을 쓰고 기념비가 되었다. 김세린은 이를 이정표 삼아 기억의 안부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지점으로 삼는 듯 보였다. 나는 가끔은 지나치게 억눌려 생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솔직하게 품어 꾸린 김세린의 세계를 마주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은 비교적 기능과 형태가 명확하다. 자신만 아는 지극히 개인적인 말들이 반듯하고 단정한 사물에 담겨 기호처럼 사용된다.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나 어떤 견해와 입장으로부터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전부를 말했다는 비밀스러운 해방감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 김세린은 은폐하기를 성공하면서도 진실만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면죄부를 얻는 듯 보였다.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사물은 그 종류가 다소 제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자전적이고 성찰적인 태도 끝에 선택된 언어들이다. 김세린은 작업할 때 미리 종이조각에 그려 넣은 사물을 화면 위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수고스럽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사물 간의 위치와 거리를 미세하게 조정한다. 화면 안의 사물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맺는다. 나는 김세린의 그림을 문장처럼 읽는다. 내가 주어로 삼은 사물이 주변부 사물과 얽혀 어떻게 서술되는지, 그들의 인과관계를 상상한다. 그렇게 뒤적거리다 보면 되레 내가 잃어버린 내면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순간엔 사물과 사물 사이 여백 역시 어떤 문장들의 행간처럼 느껴졌다.
삶은 가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들의 연속이다. 김세린은 이에 동요하지 않고 매 순간 진솔하게 임하길 바랐다. 이 절박한 다짐은 강박적으로 색을 제한하던 이전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혹적으로 시선을 빼앗고 섣불리 감정을 판단하게 만드는 색을 경계했다. 치우치지 않도록, 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기 위해 흑백을 선택했다. 색이 제거된 세상에서 한때 스스로를 이루던 것들을 모조리 꺼내 마음 놓고 게워 냈다. 그는 언젠가 마지막으로 쓰는 유언처럼 밑천이 동나버리는 순간을 염려했고, 곧 찾아올 것이라 예언했으며, 결국 마주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과정들이 지금껏 과거에 머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행했던 시간임을 직감한 듯 보였다. 사물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이제 지난 것들이 지나간 지금을 주목한다. 이 긴 여정 끝에 내뱉는 말에는 제한된 색도, 억지스러운 고집도 없다. 찢어진 상처처럼 벌어진 틈 사이의 세상엔 비단 아픔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세린의 세계를 엿보며 그동안 미처 돌보지 못했던 기억을 되찾고, 여전히 당신을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되묻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_김희연
삐딱한 자세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의 그림 옆에 서 있던 김세린을 기억한다. 박쥐 모양의 검은색 덩어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림이었는데, 본인과 작품이 똑 닮아 묘하게 우스웠다. 기분이 말과 표정으로 쉽게 드러나는 나와 달리, 김세린은 언제나 침착했다. 뱉어버린 말이 향할 곳을 직시하며 염려했다. 또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이것저것 일그러진 것들 사이로 언짢은 티가 날까 꽁꽁 싸매 묶어두는 편을 택했다. 우린 함께 예민했지만, 그것 말고는 모두 달랐다. 나는 이따금 김세린이 그린 그림들로 그의 상태를 가늠한다. 정갈함 대신 가장자리가 불분명해지고 어긋난 무언가가 생겨날 때면 말을 걸어서 얻을 게 하나도 없는 상태니 그냥 가만히 두어야 한다. 말과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은 그림이 대신 소리치고 동요한다.
김세린은 무엇이든 쉽게 미워하지 않았다. 누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솔직히 10분 정도는 그 사람을 평생 안 보고 살 상상이나 하는 난 그런 그가 신기했다. 누군가와 다투면서도 상대를 더욱 미워할 궁리를 하기보단 좋은 면을 기억하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약한 부분을 찌르고, 덮어두고 외면하며, 냉정하게 뒤돌아 버리는 것이 더 익숙한 세상에서 김세린이 지키는 믿음과 신뢰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 궁금했다.
나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보다는 알았던 사람을, 가지고 싶은 것보다는 쥐고 있던 것을, 아는 것보다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뒤를 의식하며 걷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머물게 되는 지점들이 있는 게 분명했다. 김세린은 이해하고 싶기에 잊지 못하는 사건과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의문들의 곁을 지켰다. 내 눈에는 그냥 툭 털고 나아가면 그만인 일까지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오래 지난 일도 또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에(종종 무책임하고 싶은 나에게 가장 난감한 부분이다.) 자신에게 잔인하게 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꼴이 못마땅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제사나 의식을 치르듯 이미 지나간 것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꺼진 믿음으로부터 자라난 것들은 사물의 탈을 쓰고 기념비가 되었다. 김세린은 이를 이정표 삼아 기억의 안부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지점으로 삼는 듯 보였다. 나는 가끔은 지나치게 억눌려 생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솔직하게 품어 꾸린 김세린의 세계를 마주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은 비교적 기능과 형태가 명확하다. 자신만 아는 지극히 개인적인 말들이 반듯하고 단정한 사물에 담겨 기호처럼 사용된다.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나 어떤 견해와 입장으로부터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전부를 말했다는 비밀스러운 해방감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 김세린은 은폐하기를 성공하면서도 진실만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면죄부를 얻는 듯 보였다.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사물은 그 종류가 다소 제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자전적이고 성찰적인 태도 끝에 선택된 언어들이다. 김세린은 작업할 때 미리 종이조각에 그려 넣은 사물을 화면 위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수고스럽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사물 간의 위치와 거리를 미세하게 조정한다. 화면 안의 사물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맺는다. 나는 김세린의 그림을 문장처럼 읽는다. 내가 주어로 삼은 사물이 주변부 사물과 얽혀 어떻게 서술되는지, 그들의 인과관계를 상상한다. 그렇게 뒤적거리다 보면 되레 내가 잃어버린 내면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순간엔 사물과 사물 사이 여백 역시 어떤 문장들의 행간처럼 느껴졌다.
삶은 가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들의 연속이다. 김세린은 이에 동요하지 않고 매 순간 진솔하게 임하길 바랐다. 이 절박한 다짐은 강박적으로 색을 제한하던 이전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혹적으로 시선을 빼앗고 섣불리 감정을 판단하게 만드는 색을 경계했다. 치우치지 않도록, 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기 위해 흑백을 선택했다. 색이 제거된 세상에서 한때 스스로를 이루던 것들을 모조리 꺼내 마음 놓고 게워 냈다. 그는 언젠가 마지막으로 쓰는 유언처럼 밑천이 동나버리는 순간을 염려했고, 곧 찾아올 것이라 예언했으며, 결국 마주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과정들이 지금껏 과거에 머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행했던 시간임을 직감한 듯 보였다. 사물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이제 지난 것들이 지나간 지금을 주목한다. 이 긴 여정 끝에 내뱉는 말에는 제한된 색도, 억지스러운 고집도 없다. 찢어진 상처처럼 벌어진 틈 사이의 세상엔 비단 아픔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세린의 세계를 엿보며 그동안 미처 돌보지 못했던 기억을 되찾고, 여전히 당신을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되묻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_김희연
1.전시정보
기간 : 2023. 11. 16 - 11. 26 시간 : 13:00 - 19:00 (월 휴관) 장소 : 아티스트런스페이스 쇼앤텔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로 18길 8, B1) 2.전시크레딧 작가 : 김세린 @k_i_mser_i_n 기획 : 김준환 @vaschael 서문 : 김희연 @heeeyeonkim 글 : 김세린 디자인 : 김세린 주최/주관 : 쇼앤텔 Vertical Divider
|
3.전시 소개
김세린의 작업을 처음 본 건 1년 전 오픈 스튜디오 때였다. 세로로 그려진 물고기 그림이 기억에 남는데 흑백의 담백한 표현과 절제된 묘사로 그려내어 생동감은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그림이 주는 존재감은 빈틈없이 단단했다. 그런 인상에서 기인한 듯한 묘한 사실성은 본래 대상이 가진 것과는 다른 낯선 실재로 다가왔다. 1년 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글과 그림을 읽다 보니 내가 그때 느꼈던 것이 미약하게나마 명확해진 기분이 들었는데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소설가가 고심해서 찾아낸 단어, 조각가가 어루만져 다듬은 조각상과 유사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닿을 듯 말 듯 하고 원하는 듯 외면하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과 망설임을 비밀스럽지만 명확하게 드러낸 사물들을 보며 자기 앞에 벌어진 세상을 맞닥뜨린 작가의 고심의 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_김준환 @vascha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