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um has come!
SHOW
이흠은 사탕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캔버스에 그려낸다. 하지만 그것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작가가 겪은 경험과 사람들, 환경 따위의 일상의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주관적인 미의 기준을 이동시켜왔다. 사탕이라는 소재를 처음 만나게 된 것 역시 우연한 계기로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탕의 조형미와 색을 재구성하여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마치 유년시절 찰흙 장난을 하면서 만들었던 그 날것의 아름다움을 찾고 싶은지도 모른다. 매 전시를 통해 조금씩 형태를 없애고 다시 재구성을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을 이어 오던 중 최근 가장 흥미로운 소재인 풍경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처음엔 한국화중 산수화의 깊이에 관심을 갖다가 이제는 특정 절기 시간 때만 볼 수 있는 자욱한 안개에 숨은 산 능선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에 일어나 넋을 놓고 보고 감탄하곤 한다. 안개로부터 가려진 산은 모두 보일 때보다도 훨씬 꽉 찬 느낌을 준다. 아마도 작업실을 시골 한적한 곳으로 옮긴 것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러던 중 계속해서 그려오던 사탕의 그것을 이용해서 산수화를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래서 사탕과 자연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으로 작업을 시도해보았고 결과물에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가끔 내가 하는 작업이지만 완성한 후의 결과가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이 그러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램이 있다면 언젠가는 나나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될 만큼의 숭고한 형상을 찾고 싶다. |
TELL
사탕은 이흠에게 있어 스스로 자신을 보여주는 은유의 방법으로 사용한다. ‘스윗가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사탕 그 이전에는 케익과 같은 것을 차용했다. 어쩌면 달콤한 것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공허하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겉이 너무 화려한 나머지 아무도 안을 보려고 하지 않아 보였다. ‘소비되는 개체’ 사탕은 그 정도의 위치에서 각종 이벤트에(발렌타인, 크리스마스) 어마어마한 양이 소비된다. 우습게도 내가 주로 그리는 롤리팝을 실제로 다 먹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런 거다. 개인주의가 허무한 건지 자본주의가 허무한 건지 아무런 답도 못 찾은 채 그것은 그 즈음에서 달달 하기만 하다. 나도 우리도 모두 뚜렷하지 않은 어디쯤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여하튼, 우연한 계기로 내 예술활동의 주 소재로 사용하게 된 캔디의 세속적인 색채와 조형성은 꽤 도시적인 느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내가 요즘 관심을 두는 것이 ‘도시와 자연’ 혹은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유희를 그림을 통해 끄집어 내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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