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jun has come!
SHOW
순수 회화에는 힘이 있습니다.
옆에서 보면 납작할 뿐인 텅 빈 공간에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바쳐온
수많은 작가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유지를 잇고 싶습니다.
부족하게 보일 수 있지만 저 또한 목숨을 걸고 회화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회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저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서로의 영혼마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회화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작가노트_오영준
TELL
어려운 세상입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잃은 것들, 잊고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누구에겐 그것이 휴식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제 작업을 통해 평소에 흔히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보고,
또한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길 바랍니다.
작가노트_오영준
상주에서 보내는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 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상주를 두 번 방문했다. 상주의 인상을 결정한 것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밤의 어둠을 뚫고 도착한 상주에는 당시 내가 겪고 있던 심정적 힘겨움과는 무관한 평화가 온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안도감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상주를 다시 한 번 방문한 지난해 겨울, 형태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피로는 여전했다. 나는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가늠하기에 진력이 난 서울의 30대였다.
상주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에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상주라는 특정한 장소가 작가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영준은 상주의 폐교를 작업실로 사용한다. 이 폐교는 작가인 그의 부친이 사용하는 작업실로, 그가 서울살이를 마치고 상주로 내려오면서 공동 작업실의 모양새를 띄게 되었다.
학생들이 떠난 학교는 자연이 인간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가는 풍경을 보여준다. 운동장은 풀로 뒤덮여 들판으로 변했고, 건물 한편의 소사는 굳게 잠겼으며, 식수대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 고라니와 꿩이 수풀 사이를 거닐고 산새소리가 가득하다.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억새 사이를 헤치며 걷다 저 멀리를 바라보면 남쪽 평야의 야산들 너머로 노을이 펼쳐진다. 번잡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화가 감도는 폐교의 풍경은 작가가 “우리 속의 보다 근본적인 것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토양 그 자체”로서 자연의 이미지에 다시금 주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상주에 남겨진 자연 속에서 작가는 앞만 보고 달려가기를 종용하는 현대 사회가 지워버린 가치들을 환기하고 회복시킨다는 소망을 품었다.
작가는 자연이 가진 회복의 가치를 ‘기운’이라고 칭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작가는 이 기운을 존재의 “생명력”, “아우라”, 또는 일찍이 올덴버그가 언급한바 “우주에 내재해 있는 마술적인 힘”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초기작 <기억 속의 나무>(2013)는 이 기운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어느 비오는 날 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를 마주하고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신성함을 간직하고 있는 느티나무는 이 작품에서 어스름한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자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같은 경험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자연이 가진 힘에 대한 경외감을 자연스럽게 품게 했다.
<기억 속의 나무>와 <기운>(2013) 시리즈를 비롯한 초기작들에서 자연의 형상이 화면에서 부드러운 물감의 번짐으로 이루어진다면, 최근 작가는 자연의 기운을 직접 화면에 담는다는 목적에 좀 더 적합한 표현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9점의 <Fluctuation>(2017) 시리즈는 이러한 작가의 방법적 모색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힘찬 붓질에 기운을 담으려고 하거나, 집약된 나무의 형태를 통해 그 안에 내재한 기운을 응축시키고자 시도한다. 그 중 <Fluctuation #3>(2017)은 단연 눈길을 끈다. 이미지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무엇보다도 기운 자체의 역동에 주목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예시한다. 이 작품에서 나무의 구체적인 형상은 거의 사라지고 고대의 신화적 동물이 지나간 흔적과 같은 근원적인 형상이 자리한다. 다른 한편, 기법의 측면에서 두터운 마띠에르와 분절된 스트로크(stroke)의 조합으로 특징지어지는 <Fluctuation #3>은 붓질에서 벗어난 또 다른 기법으로의 전환점을 보여준다.
최근 작업에서 작가는 캔버스 표면에 기운을 직접 담아내기 위해 스트로크를 입히는 도구, 재료, 방법 전반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전선다발을 사용하여 캔버스를 반복적으로 두드리거나 채찍질하는 기법이 그것이다. 전선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 가진 탄성과 강도 때문이다. 구리선과 고무 피복으로 이루어진 전선 다발은 지나치게 나긋하지 않아 강렬한 타격의 흔적을 만들어내기에 맞춤이다. 때로는 전선의 끝을 한 번 더 묶어 좀 더 거친 느낌을 유도하기도 한다. 물감에는 공업용 미디엄을 섞어 무게와 부피를 더한다. 이는 캔버스 표면을 두텁고 거칠게 만들어, 이미지가 가진 에너지를 한층 끌어올린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 같은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수백, 수천 번 타격을 가한다. 캔버스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의 신체를 자연의 기운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변화시킨다.
수많은 두드림 끝에 쌓인 물감들은 비로소 자연의 형상을 이룬다. 폐교 뒤편에 가득 자란 대숲을 모델로 삼아 그린 6폭의 회화인 <눈 내리는 밤>(2018)은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가장 최근의 작품이다. 눈이 내린 대숲은 어둠에 잠겨 고요하다. 이때 작가는 그가 그리는 이미지가 단순한 자연의 모방과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그는 야외에 캔버스를 놓고 작업하거나, 사진을 찍어 작업에 사용하지 않는다. 문득 운동장 뒤편으로 나가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대나무 잎사귀에 쌓인 눈덩어리가 바스락거리며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작가는 이렇게 호흡하듯 포착한 자연의 이미지를 켜켜이 모아 화면에 녹여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제의 과정을 거쳐 더욱 밀도 높고 강렬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리라고 믿는다.
작가는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렇듯 자연에 내재한 본질적인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스스로의 시도가 모더니스트의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이미지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회화가 가진 힘을 믿기에 그는 필히 모더니스트일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최근에는 보기 드문 것이다. 현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담론들의 각축장으로 변해가는 오늘날 유행이 지난 과거의 담론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안으로 끊임없이 파고드는 “강렬한 고백”과도 같은 작업을 통해, 더 높은 차원에서 세계와 접속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노을이 지는 상주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상주가 잠시나마 필자에게 주었던 평안처럼, 작가의 작업으로 인해 자연의 기운이 삶에 지친 도시의 사람들을 일시적으로나마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의 터미널에 선 나는 확신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복잡한 현실에서 한 폭의 회화가 그리도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이제는 온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미적 경험이 어디에선가는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끝없는 회의 속에서도 누군가로 하여금 그것을 지속하게 하는 예술의 힘에 대한 버리지 못한 믿음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작품이 하게 될 것이다.
- 이주연 (서울시립미술관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