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mo has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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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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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 단계 1과 2사이 어딘가..
[ 검은색빛: 어둠을 바라보기 ]
서울의 밤은 빛으로 가득하다. 이 빛은 자본과 욕망이 한데 어우러져 펼치는 무대를 보여준다. 거리의 가게들은 저마다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치장하고, 더 밝은 전광판은 더욱 높은 가치를 표방하며, 누군가 미디어의 빛에 노출될수록 우리는 그가 응당 주목 받아야 할 이임을 알게 된다. 모두가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기 위해 분투한다. 이렇듯 어둠을 망각한 것처럼 보이는 도시 서울에서 양현모는 “빛에 사라지지 않는 고정된 어둠” [1]을 만들어내고자 애쓴다. 빛 너머의 어두운 풍경 속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보이지 않는 어둠
작가는 밤의 어둠 속을 산책하며 채집한 풍경을 그린다. 불현듯 나타나는 불빛, 뚜렷이 분간할 수 없는 희미한 형상, 어둠 속에서 더욱 까맣게 드러나는 그림자 등이 주목의 대상이다.
작가는 밤의 풍경에 주목하게 된 계기로 어둠과 마주할 때 느끼는 ‘동요’와 ‘평온’의 이중감정을 언급한다. 경험에 비추어 이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완전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주위를 둘러싼 대상은 물론, 익숙하던 자신의 몸조차 낯선 것으로 바뀐다.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이 생경한 감각은 곧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로써 어둠은 타인 혹은 자신의 시선으로부터 주체를 숨겨주며 잠시나마 복잡다단한 삶의 문제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선사한다. 어둠 속에서 자신은 그 무엇으로도 재현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을 수 있다.
이런 경험에서 발견되는 어둠의 고유한 역량은 대상과 주체를 인식할 수 없는 혼돈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현모의 회화가 인식 불가능함에서 비롯된 어둠의 권능을 구현하려는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단정하게 캔버스 위에 자리한 밤풍경들은 통제할 수 없다는 압도적인 감각의 구현과는 분명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 이 고정된 어둠은 우리의 동요를 야기하지 않으며, 보기에 쉽지는 않더라도 분명한 인식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물러나 정도를 지킨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실제로 수행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실제 어둠이 주는 경험의 의미가 무엇인가 살피기보다, 그러한 어둠의 경험과 이 회화적 대상이 주는 경험의 차이를 살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회색 공간: 보기 위한 어둠
때로 미술관은 전시의 환경 자체를 어둡게 만든다. 그것을 블랙박스라 한다. 이 같은 전시 양식은 대부분 관객을 작품에 집중시키기 위해 어두운 배경을 요하는 발광체로서의 영상 작품을 위해 조성된다. 이와 달리 회화의 전시는 흰 벽 위에서 이루어지며, 조명과의 긴밀한 협업이 필수적이다. 왜 검은색이 아니고 흰색인가? 왜 회화는 조명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가? 이유는 명백하다. 회화가 스스로 발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빛은 회화의 오랜 주제로서, 많은 화가들이 화폭에 빛을 고정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물감이라는 회화의 물리적 조건은 빛에 다가가려는 회화의 움직임을 제한하는바, 빛을 재현하려는 한 회화는 이율배반 속에 존재한다. 회화가 빛을 말하고자 한들 회화는 스스로 빛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말하고자 하는 회화 또한 이와 같은 이율배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회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타자, 즉 빛에 의존하고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역설로 작동한다.
회색 공간은 이런 이율배반 속에서 탄생한다. 작가는 그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진한 회색의 시트지를 골라 벽에 발랐다. 이 회색 공간은 회화를 위해 선택된 어두운 환경으로서, 화이트 큐브와 블랙박스 사이에서 독특한 의미를 획득한다. 전혀 달라 보이는 이 세 공간은 한 가지 점에서 동일하다. 그곳에 놓여있는 것을 ‘보기’의 대상으로 선언한다는 점이다. 다채로운 조형 요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이트 큐브처럼, 영상의 빛으로 시선을 이끌기 위해 조성된 블랙박스처럼, 회색 공간은 이 작품이 구현하는 것이 그 무엇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이 아니라 잘 보이지는 않더라도 보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어둠임을 알려준다.
천천히 보기
그렇다면 이 회색 공간은 어두운 그림들을 어떻게 보도록 하는가? 흰 벽 위에 놓일 때 이 그림들은 즉각 검은색으로 인지된다. 반대로 이 그림들이 검은 벽 위에 놓일 경우, 어둠 속에서 점점이 드러나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지워낸 부분이 하얗게 강조된다. 회색 공간은 작가의 회화를 단일한 색조로 환원하거나 특정 부분에 주목하게 하는 흰색 혹은 검은색의 벽면과는 반대로 작동한다. 진한 회색의 벽면은 양현모의 회화가 표현하는 것이 완전한 검은색도 아니고 흰 빛도 아닌, 그 사이의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관객이 화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볼 때, 미세한 색조의 차이 속에서 조금씩 무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분무기, 옷걸이, 벽과 천장,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 “잘 보이지 않던 것”을 “잘 보게 하는 일”.[2] 이것이 보기의 대상으로서 양현모의 회화가 수행하는 첫 번째 작용이다.
우리는 이제 어둠을 보게 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보려 하는 순간 혹은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어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어렵사리 어둠 속의 모호한 형상을 특정한 대상으로 포착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온전한 어둠이 아닌 것으로 변하고, 더 어두운 무언가가 그 너머에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둠을 지시하는 일은 더 어두운 것을 향해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주변 공간을 적나라하고 뚜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고 어둡게”[3] 만든다. 그리하여 작가의 회화는 ‘잘 보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을 것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또 다른 보기의 역동을 이끌어낸다. 작가는 이런 회화의 작용을 일컬어 ‘검은색빛’이라 한다.
처음부터 이율배반 속에 자리하는 이 어두운 그림들은 결코 완전한 어둠을 보여줄 수 없다. 혹여나 무언가 보여준다면, 어둠 자체가 아니라 어둠을 바라보는 태도에 함축된 의미다. 그의 회화가 보여주듯 어둠을 바라보는 일은 보지 못하던 곳에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고,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차이를 섬세한 눈길로 살피는 일이며, 끊임없이 물러서는 무언가를 쫓아가는 일이다. 결국은 잡히지 않는 어둠이기에 이 바라봄의 행위는 실로 무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빛 아래 밝게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는 이는 그 너머의 어둠 속을 바라보는 사람보다 덜 보게 되리라는 사실일 것이다.
지금, 이곳의 어둠
이러한 보기의 태도를 간직한 채, 다시 한번 빛으로 가득한 서울을 바라보자. 도시의 불빛은 자본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곳은 빛을 향해 이끌리는 우리 눈동자의 본능을 이용하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바라보는 데 들일 시간이 없다고 끊임없이 재촉한다. 빛이 닿지 않는 비가시적 영역에는 영웅이 아닌 사람들이 머무른다. 그곳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폭력과 보이지 않는 슬픔이 있다. 어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내자고 담담히 권하는 이 그림들은 계속 자문하게 한다. 어둠 속엔 누가 있을까?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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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노트에서 발췌.
[2] 작가 노트에서 발췌.
[3] 작가 노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