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oon has come!
예술행위 이어가기_’보통의전시’ 아카이빙북(대담집)
56명의 참여자들과 두 달 동안 함께한 예술행위의 기록물 PDF-Eboook으로 다운 가능합니다. A5사이즈(148 x 210,181페이지), Design by Yuna NAM, 2018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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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 그는 조용히 자신의 수집품들을 꺼내 놓았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반겼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저 '밈(Meme)'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정치적 요구나 미적 수용도 없습니다. 제 미술은 사회적 전이와 전염의 '매개(Vermittlung)'가 되고 싶을 뿐, 주체적 성격을 가진 아름다움의 탐구로 여겨저선 안 될 말입니다.그러므로 밈의 원자를 지닌 저로서는 이번 전시에 여러분을 초대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던 것입니다.제 방법이, 이 기회를 빌려 여러분 중 이미 누군가 미술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길 바라는 바입니다. 더불어 저는 초대, 그리고 전달이라는 최소한의 정치적 방식으로 예술가로서 자유로이 살고자 하는 욕구가 여러분의 '생명에의 의지(Wille zum Leben)'(쇼펜하우어)와 다르지 않음을 밝힙니다.즉, 제 미술의 무게가 이 사적 아카이브 공간을 부유하는 먼지의 중력과 같을 거란 말입니다." |
show and tell_1 |
TELL
보통의 미술가 _1.여느 하소연 저는 오늘도 어김없이 KTX 부산 행 첫 차를 타고 대구의 공장으로 출근합니다. 비단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서- 가 아니라, 솔직히 그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미술공간을 운영하게 돼 버린 마당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킬 것이 생기면 반드시 뭐라도 해서 챙겨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그걸 아마 사람들은 인생이라 부를 겁니다. ‘나는 내 미술을, 내 공간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지금 제게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말 간 표백제에 세척된 영혼을 짊어지고 새벽녘 서울을 나섭니다. 격주 근무지만 도착하면 사 일 이상은 당장 촉수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저 책상 위 모니터를 켜고 끄길 반복해야 하는데, 스위치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건 퍽 고달픈 삶의 연속입니다. 고속열차 출근길도 이골이 날 지경이니까요. 일단 저는 하소연을 해야 됩니다. 그 사정이란 제게 맡겨진 회사의 업무가 결코 소임이라 할 수 없는 탓입니다. 자재 입출고 관리와 장비 구매 견적 검토 후 직접 납품하고 제품 안내책자 디자인도 모자라 영, 일어 통번역과 해외 출장까지- 여러분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봐도 중소기업의 일개 사원이 견딜 수 있는 몫 그 이상입니다. 차라리 단순노무만 한다면 다른 업무스트레스라도 없으니 좋으련만, 사회와 타협한 대가로 일주일 중 사 일을 버리고 그저 삼 일을 얻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의 총책임자를 아버지라 할 순 없습니다. 다만 회사 일을 배우라는 암묵적이고 집요한 요청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꽤 오래 고민도 했지만 저는 혈연으로서 주어질 사명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단의 기저엔 늦지 않은 나이에 발현된 가족애와 사회적 책무에 대한 결연한 다짐 같은 게 있었습니다만- 엄밀히 ‘의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당찮게- 늘 자기중심적 소동극의 주인공으로 자란 저라는 아이도 어느덧 집안의 두 번째 남자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나면 뭐라도 하며, 먹고, 자라서, 성체로 짧은 전성기를 누린 후 노쇠하며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입니다. 말인 즉 저는 집안의 두 번째 위치에서 피할 수 없이 그 위로 오를 터인데, 그 사이 일인자의 전성기가 지난 것도 모른 채 제멋에 살다간 머지않아 가족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릴 게 뻔했습니다. 그리되면 바람대로 활동적 미술인간이 되고자 하는 소망은 고사하고 제 양심마저 지키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엄습했다, 는 말입니다. _2.공포와 두려움을 감시하는 인간 아버지도 당신께서 맡기신 일들에 제가 썩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계십니다. 못내 따른 일이니 즐거울 수도 없을 뿐더러 몸에 탈이 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오기와 집념을 버틴 결과로 얻은 병까지 누굴 원망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만, 덕분에 모양새는 정말 끔찍해졌습니다. 허리디스크와 목 담 증세로 시달리면서도 몸이 남아날 틈도 없이 일에 내몰리는- 제 자신이 마치 그레고르(변신, 카프카)라도 된 듯합니다. 나무형이 런던에 있을 때부터 줄곧 저를 유리-몸이라고 놀리더니, 그나마 부정할 수 없게 돼버린 것입니다. 그레고르는 흉측한 해충이 돼지만, ‘아, 제 몸이 유리몸뚱이라니!’ 어쩌면 그 몸은 보기에 아름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회사일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제 아름다울 주말만을 생각하기로 합니다. 하니 얼마든지 저 빌어먹을 정도로 가학적인 근무환경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 지독한 엄살의 이유는 이깟 어울리지 않는 일- 누군가의 권력과 명령에 따라야한다는 굴종의 핑계로 원하는 걸 마음껏 집중할 여력마저 빼앗긴다는 투정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모습 탓에 유일한 안식이던 저 놀이터로부터 영영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 공포가 퍽 싫습니다. 미술을 할 수 없다니요. 그러니 두려워 견딜 수 없는 것도 참아내기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체한 마냥 사무실의 날들을 삼켜내 예쁜 주말을 얻는 저는- 그제야 집의 주인이자 자유로운 미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
keep in touch_Seoul |
[ Project Participants 1_20 ]
_3.억지인간
사실 저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억지스럽습니다. 자유를 위해 주말도 ‘일’을 하니까요. 우선 집에 돌아오면 시설과 장비를 점검하고, 다음 전시를 위한 작가미팅을 하고, 운영자금을 조달할 궁리에 관련 지원부처의 웹을 부지런히 기웃거립니다. 집 밖에선 서로 지구 정반대 편에 서 있을 법한 저와 아버지의 관계를 제하고- 라도 다른 가족들에게 제가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일원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쪼갤 수 없는 원자를 쪼개듯 어찌어찌 시간을 내서 가까스로 지금 작업과 미래의 자신을 고민합니다. 동시에 연애활동까지 하니, ‘이것은 정녕 위대한 철학가 하이데거와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설명해내기 어려운 현상이 아닐까요?’ 요지는 ‘현존재’(Dasein, 하이데거)인 척 모든 걸 무리하여 기어코 해내는 제가- 정작 자신으로부터는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머얼리- 떨어진 참 한심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란 세계는 절대로 예술행위를 포기하거나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언뜻 강직한 집안의 장손으로 얌전히 포장된 자신을 돌볼 안식은 미술과 음악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안녕을 바라며 오롯한 제 꿈을 짓습니다. 아버지가 결코 구축할 수 없는 판타지 속- 현실의 그 남자를 성당의 아버지로 대체합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 환상을 완성하려 실제 성당에도 취미를 붙입니다. 그러면 비로써 그 얄팍한 금박 포장으로부터 벗어나 성에서 완벽히 창조된 저는, 집으로 돌아와 수집된 판타지를 하나둘씩 현실로 조립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상된 반영(reflection)을 설명하려 구구절절 ‘제 정체성이란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부정하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뻔한- 토 따위는 달지 않을 작정입니다. 항상 독립적이어야 할 저로부터 오직 스스로를 어르기만 바랄 뿐, 다른 건 별 관심도 없습니다. 하여 촌스럽게 사춘기가 지났지만 아버지의 영혼을 즐기지 않습니다. 단지- 그렇습니다. 솔직히 세상 사람들도 저처럼 가족에게조차 허락할 수 없는 독자적 영역을 원하지 않던가요? 핑계 같지만, 저도 남들처럼 유일한 사물과 장소를 가지려 어린 시절 그토록 방황을 일삼았던 겁니다. 여러분은 한 번쯤 그런 바람이 없었는지요. 현실가족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또 인간사회가 지독히 잔인하고 비열해서 예술세계로 달음박질 치고 싶던- 간절함 말이지요. 돌이켜 보건대 저는 평생 그랬던 것입니다.
달음박질이라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 기꺼이 뛰어 들었다.’ 라고 봐야 옳을 겁니다. 그 당시 저란 아이는 장난감과 놀고 만화책을 읽는-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아들 역할이었습니다. 그렇게 메소드 연기를 하고 나면 보상으로 바라던 볼트론과 만화책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만질 수 없는 제게만 주어질 장난감들이- 다행히 이런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리차드 도킨스)에게도 아주 따뜻하고 헌신적인 모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머리가 크면서 차츰 독립의 의지가 강해지니 응당 그것마저 제 벌이로 해내기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그 바쁜 와중에 억지웃음까지 익히고 말았습니다. ‘그래, 유리 창 너머로 웃어주자.’ 이런 마음이었다, 랄까요. 여전히 ‘사회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드디어 제 모습은 투명한 미소로 웃고 있는 저 유리 수납장과 같습니다. 마치 밖에서도 안이 훤히 보이는- 삶을 버틴 결과입니다. ‘이 얼마나 예술가로서 구해야 할 생(生)을 향한 생(生)의 정연한 태도란 말입니까?’
[ Project Participants 21_40 ]
_4.정연한 회고전(성장통 이어가기)
저는 그 체계 위에 수집한 기록물들을 가지런히 진열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하던 시기, 제 미술의 이기와 이타성에 대해 고민하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무엇이던 한 가지는 모으더군요. 그게 돈이든 기억이던- 오늘날 수집이라는 재연(re-enactment)행위는 사회적으로 전이와 전염 그리고 오염과 정화라는 순환 과정을 통해 미적 재현(representation)이 가능토록 합니다. 해석하자면 그것을 미술로 소모하는 저 또한 쌓이거나 모아진 밈(Meme)의 ‘재현’이기에- 겉보기 평범한 어느 소년의 일상처럼 인터넷을 유영하며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분열을 합니다. 그 흔한 존재로의 취미들이 자연스레 주체적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상의 시공간이라는 무한한 진화능력을 바탕에 둔 ‘밈’의 고향에서는 어떠한 형식으로 배열하고 나열하더라도 예술행위의 자기증식을 막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열병식으로도 비춰질 법한 이번 행사가 제게는 매우 의미 있는 재출발이자 변곡점입니다. 하니 이 전시의 정체성이란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모으는 힘’에 미술의 목적을 두고 있는 스스로를 초대된 여러분으로부터 보통 예술가로 불리기 위함입니다. 해서 이 살아 있는 이방인의 회고전에서는 내부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낮선 곳으로부터 존중은 원치 않을 요량입니다.
‘동시대’ 미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적이며 ‘미적 경험은 분명히 공적 측면성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중심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철학가 한병철의 지적처럼- 이런 애착이 저의 미술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게다가 지금껏 해내고 있으니, 이야말로 생과 예술이 상통하는 고양된 삶이 아닐까요. 여러분 저는 그렇게 ‘밈’의 평범함으로 살아있겠습니다. 그 일반적이고 미미한 서사들에게 게임, 판타지 소설, 망가와 장난감 수집은 스스로 끝나지 않을 성장통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구원’(Die Errettung des Schönen, 한병철)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해, 앞으로 쭉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 역사를 드러내지 않을 명분도 없습니다.
끝으로 이 공간에 초대된 여러분이 저와 함께 미술놀이를 즐기길 희망합니다. 제 성장통의 과정을 확인하고 취미와 놀이의 구원을 통해 ‘이어가기’ 중인 ‘밈’에게 영감을 주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예술과 삶을 구분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 하고 있거나, 할 수 있습니다.
강나무_미술수필가
_4.정연한 회고전(성장통 이어가기)
저는 그 체계 위에 수집한 기록물들을 가지런히 진열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하던 시기, 제 미술의 이기와 이타성에 대해 고민하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무엇이던 한 가지는 모으더군요. 그게 돈이든 기억이던- 오늘날 수집이라는 재연(re-enactment)행위는 사회적으로 전이와 전염 그리고 오염과 정화라는 순환 과정을 통해 미적 재현(representation)이 가능토록 합니다. 해석하자면 그것을 미술로 소모하는 저 또한 쌓이거나 모아진 밈(Meme)의 ‘재현’이기에- 겉보기 평범한 어느 소년의 일상처럼 인터넷을 유영하며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분열을 합니다. 그 흔한 존재로의 취미들이 자연스레 주체적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상의 시공간이라는 무한한 진화능력을 바탕에 둔 ‘밈’의 고향에서는 어떠한 형식으로 배열하고 나열하더라도 예술행위의 자기증식을 막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열병식으로도 비춰질 법한 이번 행사가 제게는 매우 의미 있는 재출발이자 변곡점입니다. 하니 이 전시의 정체성이란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모으는 힘’에 미술의 목적을 두고 있는 스스로를 초대된 여러분으로부터 보통 예술가로 불리기 위함입니다. 해서 이 살아 있는 이방인의 회고전에서는 내부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낮선 곳으로부터 존중은 원치 않을 요량입니다.
‘동시대’ 미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적이며 ‘미적 경험은 분명히 공적 측면성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중심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철학가 한병철의 지적처럼- 이런 애착이 저의 미술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게다가 지금껏 해내고 있으니, 이야말로 생과 예술이 상통하는 고양된 삶이 아닐까요. 여러분 저는 그렇게 ‘밈’의 평범함으로 살아있겠습니다. 그 일반적이고 미미한 서사들에게 게임, 판타지 소설, 망가와 장난감 수집은 스스로 끝나지 않을 성장통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구원’(Die Errettung des Schönen, 한병철)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해, 앞으로 쭉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 역사를 드러내지 않을 명분도 없습니다.
끝으로 이 공간에 초대된 여러분이 저와 함께 미술놀이를 즐기길 희망합니다. 제 성장통의 과정을 확인하고 취미와 놀이의 구원을 통해 ‘이어가기’ 중인 ‘밈’에게 영감을 주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예술과 삶을 구분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 하고 있거나, 할 수 있습니다.
강나무_미술수필가
[ Project Participants 41_56 ]
주석
1. 변신(Die Verwandlung, 1916)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중 하나이다. 주인공 그레고르가 가족의 비인간적 공포에 시달리다 결국 억압된 소망을 표현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최후를 맞이한다.
2. '거기(Da) 있음(sein)'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이나 본질은 실존의 가능성이다. 이를 실존성 즉‘세계-내-세계(Das in-der-Welt-sein des Dasein)'에 더불어(공동의) 처해 있음(상태성)의 ’이해‘라는 실존 범위를 가진다.
3. 밈(Meme)의 개념은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에서 처음 등장한다, 한 사람 혹 집단의 자기복제의 방식으로 지성(사상, 믿음)이 전달될 때 유전적 모방이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
4. 나르시시즘(Narcissism) 신화에서 그 어원을 따왔으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용어로 유명하다. 오직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5. 아름다움의 구원(Die Errettung des Schönen, 2016) 저자에 따르면 타자를 회피하지 않고 곁에 머무르려는 태도가 타자에 대한 존중 즉 아름다운 공존과 대상에 대한 윤리적 공정성을 구현한다고 했는데, 이를 이루는 요소가 자유와 예술의 자기목적성이라는 헤켈의 주장으로부터 근거했다.
1. 변신(Die Verwandlung, 1916)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중 하나이다. 주인공 그레고르가 가족의 비인간적 공포에 시달리다 결국 억압된 소망을 표현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최후를 맞이한다.
2. '거기(Da) 있음(sein)'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이나 본질은 실존의 가능성이다. 이를 실존성 즉‘세계-내-세계(Das in-der-Welt-sein des Dasein)'에 더불어(공동의) 처해 있음(상태성)의 ’이해‘라는 실존 범위를 가진다.
3. 밈(Meme)의 개념은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에서 처음 등장한다, 한 사람 혹 집단의 자기복제의 방식으로 지성(사상, 믿음)이 전달될 때 유전적 모방이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
4. 나르시시즘(Narcissism) 신화에서 그 어원을 따왔으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용어로 유명하다. 오직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5. 아름다움의 구원(Die Errettung des Schönen, 2016) 저자에 따르면 타자를 회피하지 않고 곁에 머무르려는 태도가 타자에 대한 존중 즉 아름다운 공존과 대상에 대한 윤리적 공정성을 구현한다고 했는데, 이를 이루는 요소가 자유와 예술의 자기목적성이라는 헤켈의 주장으로부터 근거했다.